일상의 콘텐츠


월간 손재주

손글씨를 핸드메이드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의 경위는 이렇다.


일상예술창작센터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핸드메이드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은 그 이전까지 핸드메이드는 내 삶과 크게 연관 없는 주제였다.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공예품보다는 대량 생산하는 공산품을 주로 사용하며 살았다. 아무래도 저렴한 물건을 찾아다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핸드메이드에 대한 이해를 쌓는 일은 우선으로 핸드메이드에 대한 애정을 갖는 일에서 시작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생각이 손글씨와 핸드메이드가 연결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다. 구태여 손글씨인 이유는 문예창작이라는 내 전공이 글쓸 일 투성이이기 때문에.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문예창작과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나를 지도해주시던 선생님은 매주 과제로 원고지에 짧은 소설을 써오라고 시키셨다. 게으른 나는 과제를 미루다가  학원 가는 날의 전철 안에서 글을 쓰기 일쑤였다. 전철은 자꾸 흔들렸고 나는 맨끝 칸 구석으로 가서 유리창에 원고지를 갖다대고 글을 썼다. 글씨체는 전철의 진동에 따라 춤을 췄다....

월간 손재주


그림으로 했던 새로운 경험

<마포레스트 숲지기 이정원매니저 >

그림만 그리던 내가 독립출판을 하게 된 계기는 2018년 말 독일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여러가지 일로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칠만큼 빈곤해져 있을 즈음 비행기 표를 끊고 독일로 떠났다. 내 그림들을 들고 무모하게 미술관을 돌아다니던 중 정말 우연히 베를린에 있는 한 서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모양과 색을 갖고 있는 수많은 책들에 정말 말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책을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라는 충격과 함께 출판을 하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림의 시작

<마포레스트 숲지기 이정원매니저 >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엄마의 칭찬이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고 웃게 해줄 방법을 항상 고민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림’이었다.  그러다 늘 멈칫했던 나의 상태와 마음을 그림으로 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자화상’



PRESS정지연이 만남 사람 - 128. 일상예술창작센터 최현정 대표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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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변화가 잦은 홍대앞이지만 산울림소극장이 있는 ‘다복길’(와우산로 29길)은 상대적으로 변화의 폭이 적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수카라, 클럽 빵, 스트레인지 프룻, 칼디 커피하우스 등 오래된 가게들이 주는 안정감 덕분이다.
요동치던 젠트리피케이션도 이겨낸 곳들이었지만, 코로나가 남긴 그림자는 유독 짙었다. 14년 6개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카페 수카라가 2월 초 문을 닫았고,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했던 커피프린스 1호점도 이보다 앞서 폐업을 결정했다. 안타까운 소식은 또 들려왔다. 2013년 문을 연 생활창작가게 KEY 1호점도 2월 말 문을 닫는다.


KEY는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이하 홍대 프리마켓)을 운영해온 일상예술창작센터가 홍대 프리마켓 출신 작가들의 지속적인 일과 삶을 지원하기 위해 적정한 수수료로 창작물을 유통하는 매장이자, 2010년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으며 처음 시도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사실,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었다. 모델 개발을 위해 파견된 연구원이 “이게 무슨 비즈니스 모델이냐?”며 이해를 못했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결말이라고 할까.
“수수료를 이 정도 받아서 어떻게 공간이 유지되겠느냐, 어느 정도까지 비용이 안 나오면 그땐 공간을 접는다는 플랜을 세우라고 하는데 저희는 ‘어느 정도 인건비만 나오면 된다’고 계속 고집했으니까요(웃음).”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데는 몇 해 걸리지 않았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상황이 지속되었지만, KEY는 매장 운영을 지속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외부사업으로 조직이 커지면서 KEY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뒤로 밀린 탓이기도 했다.


“중간중간 ‘피봇’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초반에 금방 닫았지만 온라인 플랫폼도 만들었고, 창작자 에이전시 형태를 고민도 해봤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교외의 창고형 매장식으로 운영해볼까도 생각했어요. 다만 조직이 커지면서 당장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덩치 큰 외부사업들에 시간과 고민을 더 많이 써야만 했고 그러면서 그 고민을 깊이 있게 하지 못한 거죠. 결국 올해에 와서야 이렇게 손실을 감내하며 버티는 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창작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어렵게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과의 인연
스무살부터 홍대를 드나든 최현정 대표는 그야말로 ‘찐 홍대사람’이다. 펑크록에 푹 빠져 있었고, 다큐를 전공하여 라이브클럽을 기록하던 그는 클럽 빵을 자주 들락거리며 김영등 대표와 친해졌다. 프리마켓 일도 “주말에 별일 없으면 좀 도와주지”라는 김대표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 지금은 서울을 대표하는 예술시장으로 유명하지만, 홍대 프리마켓은 2002년 월드컵에 맞춰 기획된 공공축제였다. 월드컵 종료와 함께 표류하던 홍대 프리마켓을 오늘날까지 끌고 온 주역이 김영등 대표와 일상예술창작센터 원년 멤버들(최현정 현 대표와 신문자 국장, 이상미 팀장, 양수연 팀장)이다.


“2003년 5월에 비영리단체로 일상예술창작센터를 만들었어요. 근데 이때까지도 이게 제 일이란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2004년 마포구청이 노점상 단속하듯이 프리마켓을 막으면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언론에 알리는 공론화 과정 속에서 이 일을 계속할 의미를 찾았던 거죠. 그래서 2003년 하반기부터 프리마켓 사무국에서 상근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홍대에 깊숙이 발을 디딘 그는 누구보다 신명나게 일했다.


“그땐 신청문을 올리면 프리마켓 자원활동가들도 초반에 4,50명씩 왔어요. 또 창작자들과의 관계도 엄청 단단했고요. 또 클럽 빵 출신 뮤지션들, 지금 보면 정말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이 공연을 해줬죠. 지금은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기획을 세우고 마케팅 플랜을 세워야 겨우 될까말까인데, 그때는 계약서 한 장 없이 그게 다 됐어요.” 커져가는 마켓의 규모에 맞춰 일하는 조건도 변화가 생겨야만 했다. 일상예술창작센터는 2009년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시작해 2010년 고용노동부의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양한 창작예술, 공예 관련 지원사업, 입찰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차 사회적기업이 된 지금은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 서울여성공예센터 ‘더아리움’(이하 서울여성공예센터)의 위탁 운영 등 굵직한 성과를 낸 사회적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사업들을 끊임없이 기획하며, 일상예술창작센터에 성장 동력을 불어넣은 주역이 바로 최현정 대표다.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 그리고 따뜻한 남쪽
“사회적기업이 되어 직원을 뽑게 되면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사업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었어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본 전시를 사업으로 딴 게 첫 시작이었는데, 즐겁게 일했지만 사업을 끝내놓고 보니 이런 지원사업은 들어가는 공에 비해 남는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자고 한 게 KEY였던 거죠.”


일상예술창작센터는 그후로도 계속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2013년 시작한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이하 페어)는 그에게 가장 큰 성장을 안겨준 ‘전환점’이다. 16개국, 324개 팀이 참여했던 2019년 페어 때에는 관람객만 3만 명, 경제적 성과만 10억으로 추산될 정도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페어를 통해 일상예술창작센터의 위상을 높이고, 수공예 생산자들과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게 큰 성과였다.
“처음 페어의 방향성을 고민할 때 저희의 든든한 지원자인 문화연대 이원재 소장님, 최범 선생님, 임정희 대표님 등이 국제적인 축제로 꾸렸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셨어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구글링을 해서 홍콩 PMQ와 영국 Cockpit Arts를 찾아낸 게 시작이었죠.”


홍콩의 ‘디자인 창의기지’ PMQ와는 순조롭게 얘기가 되었지만 공예작가와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사회적기업인 영국의 Cockpit Arts와는 페어 참가를 두고 몇 달째 논의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 숨통을 틔워준 건 주한영국문화원이었다. 자신들에게 Cockpit Arts를 아느냐고 문의했던 일상예술창작센터를 떠올리며, 해당 팀이 런던 연수를 가며 Cockpit Arts를 방문한 것.


“논의를 하는 중에 데이비드 크럼프(Head of Business Incubation)가 단순히 포럼만 하려고 한국행을 잡기는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지 타임테이블을 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를 컨설팅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포럼을 진행하는 중간중간 세미나룸에서 컨설팅을 받았죠. 행사가 끝난 밤 10시에는 졸음에 겨운 두 살 된 아이를 끌어안고 눈이 빨개져서 이야기를 듣곤 했어요(웃음).”
이듬해에는 함께일하는재단의 ‘스마일투게더’ 파트너십의 합류로 태국, 대만 등 아세안 파트너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국제적 행사를 운영하는 경험을 통해 그와 함께하는 직원들 역시 새로운 비전을 세우고 네트워크를 쌓으며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의 경험만 있었던 건 아니다. 최현정 대표에게는 그것이 ‘따뜻한 남쪽’ 시장이었다.
“따뜻한 남쪽은 저희가 사실 사업으로 생각하며 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당시 연남동에 생활창작공간 ‘새끼’라고 바느질, 목공, 그림 그리기 수업 등을 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새끼’를 접고 그쪽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연남동 주민자치위원분들과 만나게 됐어요. 저희가 뭘 하는 사람들인지 알고는 강좌 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연남동은 지금처럼 뜬 동네가 아니었고 주민들은 ‘잘 사는’ 연희동과 ‘뜬 동네’ 서교동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주민들의 요구로 조금씩 생활강좌를 열었고 2011년에는 ‘마을예술창작소’로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의 창작물을 보여줄 통로가 필요했다. 그렇게 마을시장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시장 전문가’들이 연 첫 시장이 ‘폭망’했다는 사실이다. 참가자도 없고 구경하는 이들은 더 없었다. 심기일전, 이들은 편지를 써서 집집마다 전달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주민들과의 관계가 생겨났고, 참여도 대폭 늘었다. 반응도 뜨거워졌다.


봄과 가을의 주말, 작은 가로수길을 따라 열리던 ‘따뜻한 남쪽’ 시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제청과 쿠키, 뱅쇼 같은 먹거리부터 손수 만든 도마, 다양한 빈티지 옷과 컵, 그릇, 수공 액세서리와 책들이 함께 판매되던 소박한 마을시장이었다. 사고 파는 이들 모두 웃음이 가득했다. 마을시장을 계기로 일상예술창작센터는 연남동 공방 네트워크도 만들고, 연남동 공방지도도 만들며 재미난 ‘마을살이’를 누렸다. 최현정 대표는 아이가 ‘마을시장’에서 자라났다며, 홍대 프리마켓 시절 이후 못 만나던 뮤지션이 아이를 데려와 만났던 반가운 기억도 떠올렸다. 그러나 이렇게 즐거움이 가득했던 ‘따뜻한 남쪽’은 연남동 도시재생희망지 사업이 시작된 후 해당 장소에서 잦은 공사가 생기면서 벌어진 주변과의 민원, 예상치 못한 주민들과의 갈등 속에 더 이상 열리지 못하게 됐다.
“시나브로 갈등이 쌓여가면서 결국 저희가 포기하고 나와버렸어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죠. 아이를 생각하면 계속 그 동네에 살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저희가 살았던 집은 지금 카페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성산동에 와서는 굳이 우릴 드러내면서 뭔가를 하는 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와 김영등 대표(아는 분들도 많겠지만, 둘은 부부다)에게 마침 소셜하우징 기업이 사회적주택을 제안했다. 주거와 사무실을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주택(예술인 창작자를 위한 사회적주택)을 짓고 입주하기로 하면서 큰 대출도 받았다.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로 2015년 4월 착공하여 2016년 6월 완공했다. 지하에 창고, 커뮤니티실, 사무실 등이 있고 사무실과 원룸세대, 그리고 예술인 가족이 거주하는 이곳에서 살고 있다.


“사회적주택을 하자고 결정했던 즈음에는 KEY매장, 사무공간 등 임대료만 매달 600만원 넘게 나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무실과 주거의 안정성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지금은 잘한 선택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코로나19로 어려운 사정인데도 상환 기일과 금액은 그대로이고, 그 외에도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서요.”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친구들
일상예술창작센터에게 또 하나의 도전이 있다면, 그것은 3년 전부터 위탁운영을 맡고 있는 서울여성공예센터 더아리움(센터장 김영등)이다. ‘더아리움’은 서울여성공예창업대전, 감고당길 여성공예마켓, 예술시장천수답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공예가들의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곳이다. 최현정 대표는 “홍대와 공릉동으로 인력이 나뉘면서 혼자 해야 하는 일도 많아졌고, 상호 소통도 어려워 힘들었지만 여성공예가들을 위해 충분히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년 서울여성공예창업대전을 하면서 초기 창업자를 위한 교육을 맡은 적이 있어요. 그 교육을 하며 제가 해야 할 역할을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그게 KEY처럼 그들의 창작물을 더 많이 팔아주는 역할은 아니더라고요. 솔직히 이젠 온오프라인으로 KEY 같은 곳들이 많이 있잖아요. 거기 들어간다고 작가들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창작자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리스크를 줄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었죠.”
그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창작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플랫폼이건 콘텐츠이건 형태와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창작자들 옆에서 함께하는 태도와 지향을 최우선에 두는 것.
문제는 팬데믹 상황이다. 프리마켓도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도 사람들이 모여야만 가능하다. “그동안의 방식으로는 진행하지 못한다는 게 명확해진” 상황에서 그와 일상예술창작센터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당장 홍대 프리마켓부터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인데 말이다.


“지속가능성과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며, 2018년부터 계속 워크숍과 스터디를 해왔어요. 몇 가지의 가능성이 있기도 한데, 올해는 시도하지 않으려고요. 전환, 혁신이라는 키워드에 휘둘려서 빨리 해야 한다고 조급해하기보다는 올 한 해는 숨을 고르며 보내기로 멤버들과 정리했어요.”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데도 에너지가 든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 이제껏 지켜온 가치를 놓지 않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코어 같은 친구들”이라고 대답했다.
“신문자 국장, 이상미 팀장, 양수연 팀장… 만난 지 15년 된 이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못 왔어요. 친구들이 저희들의 일도, 아이도 같이 키웠어요.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제가 나가 일하는 동안, 친구들이 똥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이를 키웠어요. 손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마다 서로를 붙들어준 친구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른 아침에 나와 홍대 놀이터의 쓰레기를 치우고, 프리마켓이 끝나면 땀내 나는 몸으로 클럽 빵에서 음악을 듣고, 섬을 돌아다니며 벽화를 그리고,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달려온 15년의 시간들이, 몸으로 쌓아온 추억들이 그 어떤 대의명분보다 강하게 그들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다.


“솔직히 저희끼린 그래요. 이도저도 안 되면 건물 팔고, 국도변에서 국수집이라도 하자고. 홍대가 아니어도 어디에서든 뭘 하든, 우리가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으니까요. 물론 스스로 ‘공공재’라고 생각하는 김영등 대표는 홍대를 떠날 생각이 없겠지만요(웃음). 중요한 건 우리가 같이 만들어온 것들을 잘 정리하는 것이고, 지금 현재를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홍대가 아니어도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그가 단단한 ‘코어’를 가지게 된 데는 홍대라는 지역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이 비가 멈춘다면 난 떠날 거야! 내 친구들을 찾아서”(크라잉넛의 ‘검은새’ 중에서). 그가 좋아하는 이 노래가사처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홍대가 아닌가.


“홍대는 죽었다고들 하잖아요. 사실, 그렇죠. 스물 한 살 무렵부터 이 권역에 머물렀고, 그 상징과도 같았던, 심스타파스, 수카라 이런 곳들이 사라지는 걸 보면 속상하고 안타까워요. 그래서 홍대의 현안이 있다면, 큰 도움이 안 되더라도 나서게 되는 거죠.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세상은 변하고 지역도 변한다. 추억은 사라지고 사람들도 사라진다. 그래도 사라지 않는 건 이 동네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간직한 어떤 정서이고 감수성이고 지향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 여기, 각자의 방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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